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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화의 역습…너무 잘 크는 벼

#.전북 정읍시에서 27년째 벼 농사를 짓고 있는 쌀생산자협회장 이효신(52)씨. 지난해 논 1000㎡당 530㎏ 소출을 올렸다. 이씨는 “수확을 해봐야 알겠지만 올해는 지난해보다 생산량이 더 좋을 것 같다”며 “4년째 풍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씨는 올해 농사를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쌀 재고, 생산이 워낙 많아서 값이 폭락했다. 가격이 떨어지는 건 둘째고 판로 자체가 막혔다. 도시 사람들은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자기 월급이 수십 년 전 수준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가만히 있을 월급쟁이가 있겠나.” 

#. 21일 서울시 여의도동에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 회원 100여 명이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모였다. 국회와 정부를 향해 “쌀 가격 안정 대책을 마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모두 쌀 농사를 짓는 농민이다. 20일 전북 익산시, 12일 전주시에선 수확을 앞둔 논을 갈아엎는 시위도 벌어졌다. 폭락하는 쌀값에 벼 농가 시위는 전국으로 번지는 중이다.

175만t. 한꺼번에 실어 나르려면 25t 대형 트럭을 7만 대 넘게 동원해야 하는 양이다. 현재 정부가 창고에 묵혀두고 있는 쌀 재고량이다. 농림축산식품부 집계를 보면 전국 쌀 재고는 2014년 87만4000t에서 2년 만에 2배가 늘었다. 쌀을 창고 안에 그대로 두고 보관하는 데만 연간 5000억원이 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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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온난화로 벼 재배하기 좋은 기후로 변화"

문제는 올해 벼 수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통계청은 다음달 올해분 쌀 생산량을 잠정 발표한다. 통계청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쌀 수확량은 ‘대풍’이었던 지난해 430만t 수준을 너끈히 넘길 전망이다. 2013년 423만t, 2014년 424만1000t, 지난해 432만7000t에 이어 올해까지 4년 연속 ‘쌀 대풍’이다.

그렇다고 쌀 재배면적이 늘어난 게 아니다. 재배 면적은 2013년 83만2625㏊(1ha=1만㎡)에서 올해 77만8734㏊로 3년 새 6.5% 줄었다. 쌀 재배 면적은 줄었는데 생산량이 오히려 늘었다는 건 생산성이 올라갔다는 의미다.

비밀은 뭔가. 온난화에 있다. 한국이 벼가 자라기에 적합한 기후로 변해간다. 벼는 동남아 고온다습한 기후에 잘 자라는 작물이다.


올해 한국을 덮쳤던 유례 없는 폭염은 벼 생육에 최상의 조건으로 작용했다. 홍수ㆍ태풍ㆍ병충해 피해도 거의 없었다. 늦 가뭄까지 와 쌀 풍년을 부추겼다. 농촌진흥청 조사에 따르면 쌀(조생종 기준)이 익는 시기인 올 7월 27일부터 9월 14일까지 온도는 평년에 비해 섭씨 1도 높고 일사량은 1일 1.3시간이 길었다. 김준환 농진청 농업연구사는 "벼 작황은 등숙기(물보다는 햇빛이 많이 필요한 여뭄 때) 일사량에 특히 많이 영향을 받는데 올해 일사량이 유난히 많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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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는 이런 대풍이 반갑지 않다. 4년째 이어진 대풍을 재앙으로 본다. 현재 정부가 창고에 묵혀둔 쌀 재고량은 175만t에 달한다. 2년 만에 2배가 늘었다. 보관하는 데만 연간 5000억원이 넘게 든다.
폭증하는 재고량과 맞물려 쌀 시세도 떨어지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 유통 정보’를 보면 21일 쌀 20㎏ 도매 가격은 3만4000원이다. 2010년 이후 6년 만에 최저다. 햅쌀이 시장에 풀리면 쌀값은 더 떨어질 전망이다. 이제 벼를 수확해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해야 하는 농심은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쌀 소비량도 매년 2% 이상 줄어"

전문가는 해마다 강도를 더해가는 ‘쌀 과잉 대란’의 원인을 두고 늘어나는 공급보다는 줄어드는 소비에 더 큰 무게를 둔다. 김태훈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쌀 소비량은 매년 3% 이상 줄어들고 있다”며 “벼 재배 면적 감축과 생산 조정이 따라잡지 못하는 속도”라고 설명했다. 농식품부 집계에 따르면 1인당 쌀 소비량은 2010년 72.8㎏에서 지난해 62.9㎏으로 5년 만에 10㎏ 이상 줄었다. 40~50㎏대로 떨어지는 일은 시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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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쌀 소비 확대 방안은 헛바퀴만 돌고 있다. 쌀 가공식품 확대 방안은 외국산 쌀에 비해 높은 가격의 국산쌀로 인한 원가 문제, 제자리 걸음인 쌀 가공식품 수요가 한계다. 쌀 사료로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 대안이 되지 못한다. 농촌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묵은쌀을 사료로 전환하려면 10만t당 1500억원 이상 손실이 난다. 재고 쌀을 사료로 만들려면 정부가 구입한 것보다 훨씬 싼 값에 넘겨야 하는 데다 운송비, 처리비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쌀 사료화 대책을 추진했지만 9만9000t 규모에 그쳤다. 200만t을 향해 다가가는 쌀 재고량과 비교해 턱 없는 양이다. 대외 원조도 마땅한 해결책이 아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된 탓에 2011년 이후 쌀 원조길이 막힌 상태다. 다른 국가에 주려고 해도 국제무역기구(WTO)나 주요 쌀 수출국과 협의해야하는 데다 막대한 추가 비용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쌀보다는 다른 물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어 사회복지용 쌀 수요도 감소 중이다. 국내 저소득층 무상 지원도 해법이 안 되는 배경이다. 

농업진흥지역 해제 방안, 농식품부 부정적

추가 대응책을 놓고도 농식품부와 기획재정부, 여당과 야당 간 의견이 갈려 기싸움만 한창이다. 21일과 21일 당정 협의에서 농사만 지을 수 있는 농업진흥지역(절대 농지)을 단계적으로 해제하고 쌀 초과 생산분 35만~40만t을 격리(정부가 매입)하는 안이 논의됐다. 공공 비축미를 정부가 사들일 때 농가에 지급하는 우선지급금을 현행(4만2000원)보다 올려 잡아야 한다는 여당 제안도 있었다. 모두 근본적 대책은 아니다.

농업진흥지역 해제만 해도 효과에 대해 담당 부처인 농식품부마저 부정적이다. 김종훈 농식품부 식량정책관은 “2007년 농업진흥지역을 정비하면서 12만㏊를 해제했고 2014~2015년 수요 조사를 통해 올해 8만5000ha 정도 추가 해제를 했다”면서 “7~8년 단위로 했던 걸 매년 단계적으로 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정책관은 “농업진흥지역을 해제한다고 해서 당장 건물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올해도 인센티브를 내걸고 쌀 재배 면적을 3만ha 줄이려고 했지만 2만600ha에 그쳤다”고 덧붙였다.

직불금을 비롯한 각종 보조금 제도가 쌀에 집중돼 있는 상황이라 벼 재배 면적이 크게 줄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농업진흥지역은 한 번 해제하면 되돌릴 수 없다. 때문에 농업진흥해제를 대규모로 푸는 데 대해선 ‘식량 안보’를 해칠 수 있다는 부정적 여론이 만만치 않다. 대신 농식품부는 벼를 다른 작물로 전환해 재배하는 농가에 직접 보조금을 주는 제도를 추진 중이다. 하지만 기재부 반대에 부딪혀 내년 예산안에 반영하지 못했다. 재정당국은 나라곳간이 빠듯한 상황에서 보조금으로 생겨난 문제를 보조금으로 막아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재정이 안 드는 농업진흥지역 해제 같은 규제 완화로 푸는 게 맞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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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봉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남북 관계가 지금처럼 경색되기 전인 2011년 이전 매년 수십 만t을 대북 지원하면서 가려져 있었던 것일 뿐”이며 “쌀 과잉 생산은 10년 넘게 누적되다 최근 폭발한 것”이라고 정부와 국회의 늑장 대응을 지적했다. 한 교수는 가용한 수단을 모두 쏟아내야할 급박한 상황이라며 “평균적인 맛의 쌀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유도하는 국내 벼 정책 구조를 뿌리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3등급이 아닌 미검사 등급을 달고 있는 쌀이 시장에서 80% 가까이 차지하는 양곡표시제의 맹점, 맛의 척도인 단백질 함량 표시 의무화 폐지 두 가지를 ‘거꾸로 가는 쌀 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작물 전환시 과감한 인센티브 부여해야" 

김한호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옛날 보릿고개를 경험했던 기성세대와 정부는 쌀에 너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제대로 정책에 손을 대지 못하고 기존 대책만 반복하고 있다”며 “이대로 간다면 쌀 소비는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들 텐데 쌀 농업 전체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일본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품질 좋은 쌀은 단위 생산량이 적더라도 높은 값으로 가치를 인정받게 하고 값싼 사료용 쌀 품종은 별도로 개발ㆍ재배하도록 하는 차별화 전략을 서둘러야 한다”며 “밀ㆍ보리ㆍ옥수수 같은 식량 작물과 쌀에 대한 차별을 줄여나가고 작물 전환시 과감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것도 공급 과잉과 수입 대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말했다.



세종=조현숙 기자, 채윤경 기자 newear@joongang.co.kr

구성ㆍ제작 조민아 인턴기자 cho.min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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