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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세종대왕은 너 때문에 통곡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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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중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하이루’라고 쪽지를 보내놓고 자책하곤 했다. 유행 지난 통신체 때문에 범생이 같아 보일까봐서다. 창의적인 외계어를 구사하는 친구들도 부러웠다. 부러움은 노력을 낳았다. 신조어의 유행이 바뀔 때마다 나는 적극적 사용자의 최전선에 있었다.

시간이 흘러 ‘기자’가 됐지만 일하는 데 지장 없다. 요즘 언어에 대한 생각도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9일이 다가오면 다음과 같은 뉴스는 가급적 안 본다. 정신건강을 위해서. ‘신조어가 주는 세대 차이’와 ‘외래어에 물든 한글’ 같은 논리도 맞지 않는 기사를 보면 화가 난다. 놀이일 뿐인데 세상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어른들이라니. 특히 ‘요즘 애들은 세종대왕에게 부끄럽지도 않으냐’는 댓글이라도 발견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세종대왕이 왜 요즘 애들 때문에 통곡하시냐. 너 때문에 통곡하지.”

당연한 얘기지만 세종대왕은 지금의 표준어를 쓰지 않았다. ‘나랏말싸미 듕귁에달아…’가 오히려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어를 만든 것도 아니다. 이를 잘 표현할 한글을 만드셨다. 세종대왕은 외국어를 한글로 표현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동국정운으로 중국어 발음 체계를 한글로 표시하려는 시도도 그의 의중이 담겼다. 세종대왕이 문자를 만들며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도 모든 소리를 표현하는 거다. 또 많은 이가 한자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한글로 토성을 달기도 했다. 그러니 세종대왕은 이런 논란과 관계가 없다.

국립국어원이 다마구·와루바시 등 일제의 잔재로 남은 일본어를 순화하겠다는 거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한다. 하지만 원래 언어는 서로 영향을 받는 거다. 일본인들도 명태를 멩타이라고 부르고 영어로 숨어 있는 능력자를 Gosu(고수)라고 부르는 것처럼. 블루투스를 쌈지무선망으로 억지 순화하는 건 북한의 문화어운동처럼 느껴져 더 우스꽝스럽다. 언어는 완전경쟁시장이다. 경쟁력 있는 말, 사람들이 쓰고 싶은 말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는다. 사라지고 있는 단어가 안타깝다고 보조금을 매겨 살릴 수도 없다.

나도 벌써 신조어들을 다는 알아듣지 못하는 세대가 됐다. 인터넷에 뜻을 물었다가 욕먹고 당황스러울 때도 있고 맥락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단어가 해설을 보면 전혀 다른 의미인 경우도 있다. 어쩔 수 없다. 인류가 생존하는 한 새로운 언어 놀이를 만들어낼 테니까. 세종대왕은 언어를 잘 아셨다. 언어가 계속 바뀔 거라는 것도 아셨을 거다. 우리가 이 언어로 외국어와 비속어를 쓸 거란 것도. 사실 그럴 자유를 위해 문자를 만드셨을 거다. 그러니까 세종대왕은 통곡하신다. 한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금지하는 이들 때문에.


구 혜 진 JTBC 사회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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