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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oo으로 배웠네-시즌2] 내게 거짓말을 해봐

6개월 어학연수 중 만난 K오빠에게 난 한국에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작정하고 속이려 했던 건 아니었다. 그가 한번도 "남친 있냐"고 묻지 않았고(왜 없을 거라 생각한 거니), 난 답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나름의 변명도 있었다. 떠나오기 전, 어학연수에 반대하는 남자친구 L과 지겹도록 싸웠고, 결국 비행기를 타던 시점까지 제대로 화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나와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던 그놈께선 내 출국 전날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골아떯어졌다며 공항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단 말이다. 비행기 안에서 맥주캔을 우그러뜨리며 “너랑은 이제 끝” 셀프 이별을 선언했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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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날씨도 좋았네.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1과 서촌길을 걸었지

'최악의 하루(김종관 감독)' 여주인공 은희(한예리)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게다. 영화에서 그는 남자 셋을 동시에 만나며 이들에게 태연자약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는 여자로 그려진다. 남자친구 현오(권율)와 약속을 해 놓고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와 차를 마시며 빈둥댄다. "오고 있어?"라는 질문에는 "응, 가는 중이야"라고 답하면서. 남자친구와 소원했던 시기에 만난 부인이 있는 남자 운철(이희준)은 어떻게 알았는지 은희가 있는 곳을 잘도 찾아온다. 그렇게 하루 동안 세 남자가 얽히고 그동안 그들에게 내뱉았던 거짓말이 폭로될 곤경에 처한 은희. 그렇게 "하느님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듯한 '최악의 하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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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남자2, 귀엽지만 왠지 믿음이 안가

사람들은 왜 사랑 앞에서 자주 거짓말쟁이가 될까.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혹은 상처를 덜 받으려, 때론 상대방에게 상처를 덜 주고 싶어(라는 핑계로) 내뱉는 거짓말들은 사랑에 독일까, 약일까. 꽤 오래,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거짓말을 하고 들으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그저 사랑을 할 때 사람은 얼마나 약하고 이기적인 존재가 되는가를 생각해볼 뿐이다. 상대를 사랑하면할수록 점점 진실을 감추게 되는 슬픈 모순. 아는 이 없는 타국에서 K오빠가 전해줬던 그 별것 아닌 안도감, 그걸 잃어버릴까 두려워 기꺼이 거짓을 택했다. 한국의 남자친구와는 틈틈이 메일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 고백하고 제대로 헤어져야지'라고 늘 생각했지만, 사실은 알았다. 나는 또 거짓말을 하게 될 거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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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드기같은 남자3, 찐득찐득한 매력에 빠져들었지

세상이 반드시 정의로운 건 아니지만, 무리하게 쌓은 거짓말은 언젠가 민망한 비극으로 돌아온다. '최악의 하루' 은희가 속였던 구남친과 현남친이 남산 자락에서 딱 마주친 그 순간처럼. "언제부터 은희랑 만났어요?" "몇 년 됐는데요." "어? 나도 작년부턴데?" 이런 대화들을 나누는 두 남자 앞에서 은희는 손만 휘휘 내젓다 그만 주저앉고 만다. 이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코믹한 장면이기도 하다. 은희의 거짓말을 확인한 두 남자, 끈끈한 동지애라도 생겼는지 "내려가서 술이나 마시자"며 은희를 남겨두고 떠난다. 둘은 화를 내는 척 했지만 사실은 안도했을지도 모른다고,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 역시 은희에게 솔직하지 않았으니까. 현오는 예전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지 않았고, 운철은 "아내와 헤어지겠다"고 계속 말했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 "그래서...(부인과)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라는 은희의 질문에 대한 운철의 답은 역대급으로 찌질한 궤변이다. "음. 나는 행복해지지 않기로했어요. 나 (아내와) 재결합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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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 이렇게 시작된 최악의 하루

내게도 최악의 하루가 닥쳐왔다. 어학연수가 끝날 즈음 K오빠와 이별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남자친구를 다시 만났다. K오빠 이야기? 물론 하지 않았다. 전화로 "넌 어찌 그렇게 독하냐"고 울던 K가 연락도 없이 한국으로 날아왔다. 어느 가을날, 수업이 끝난 후 남자친구와 강의실 건물 계단을 내려가는데 K오빠가 건물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순간 든 생각은 "망했다"였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공항에 내리자마자 무작정 학교로 찾아와 과방에 들러 내가 어떤 수업을 듣는지 동기들에게 물어본 모양이었다. 나를 발견한 그가 굳은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오니 남자친구가 물었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아..아...어..그게..." 그 뒤 상황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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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끝에 남은 것은..

'최악의 하루'가 던지는 메시지는 뭘까. 거짓말하지 말자? 같은 초등 도덕교과서스런 답일리는 없고. 연애할 때 유독 빛을 발하는 비겁한 욕망과 자기모순을 한번 들여다봐주겠어, 정도가 아닐까. 사실 다들 그런거 아니야? 라고 조금 부끄러워하고, 조금 안도하면서. 영화 속 은희는 못나가는 배우다. 영화 시작과 끝, 이런 대사를 읊조린다. "저한테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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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해피엔딩이 가능할까요

거짓말로 엉망이 된 연애를 끝내고 난 지나치게 깊이 반성했다. 상대를 속이고 결국 나 자신을 기만하는 비겁한 연애는 절대 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밀당도, 내숭도, 주도권 다툼도 싫고, 거짓말은 소름끼치게 싫었다. '직진녀'로 변모한 후 남자들에게 신비감이 없다, 질린다, 부담스럽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어쩌라는 건가. 그리고 시간이 꽤 흘러 친구 A가 말했다. "사실 너 어학연수 가 있는 동안 L이 후배 P랑 딱 붙어 다녔는데, 너 기분 나쁠까봐 말 못했어." 오마이, 니가 그러면 그렇지...그리고 나는, 살짝 안도했다.

한점부끄럼없는 기자 betruthful@joo*ng.co.kr
**'연애를 OO으로 배웠네' 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문화콘텐트에 연애 경험담을 엮어 연재하는 잡글입니다. 잡글이라 함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이며 익명으로 연재합니다. 연애 좀비가 사랑꾼이 되는 그날까지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합니다. 많은 의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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