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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의 추억"-2

2002년 7월, DJ시절이었다. 한덕수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낙마(落馬)한다. 승승장구하던 관료가 하루 아침에 옷을 벗게 된 것이다.
 
뭔 일이었을까?

역시 중국산 마늘이 문제였다.
 
그 해 들어 마늘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중국산 마늘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2000년 마늘협상의 여파였다. 중국산 마늘이 시장에 깔리면서 국내 마늘 값은 땅 속으로 꺼져야 했다. 6월들어 농민들이 일어선다. 전국 각지 농촌에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이러다간 농민 다 죽는다, 중국 산 마늘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를 다시 연장하라!

여의도로 몰린 농민들.  "마늘의 추억" 1편은 http://news.joins.com/article/19570079 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왠지 꿀먹은 벙어리였다. 가타부타 얘기가 없다. 농민 이익을 대변한다는 농협중앙회가 나섰다. 중앙회는 당시 산자부 무역위원회에 '중국산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 연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무역위로부터 엉뚱한 답을 듣게 된다.

'2002년 말로 중국산 마늘 세이프가드 조치는 만료됐다'

뭔소리?

협상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중국은 '핸드폰'을 내세우며 한국 협상팀을 거세게 몰아갔다. 그들은 협상을 질질 끌며 하나 얻으면 또 다른 것을 요구하곤 했다. 밀린 우리 협상팀은 '마늘 수입을 원래대로 해줄게'라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말 나온 김에 마늘 수입을 완전 자유화하라'고 밀어붙힌 것이다.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이는 꼴이 됐다. 어쩌겠는가, 호구잡혔으니 물러날 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부속합의였다. 합의서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2003년 1월1일부터 한국 민간기업이 (마늘을)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2002년 여름 서울에서 또 다시 '마늘 파동'이 일어나게 된다. 정확히 1년 씩 건너 세 번째로 벌어진 일이다.

'치욕적인 협상이다', '다시 협상하라'는 등 여론이 들끓었다. 농민들이 서울로 올라와 연일 데모를 벌였다. 언론에서는 졸속협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누가 협상 책임자지?'
'통상교섭본부장'
'당시 누구였지?'
'한덕수 경제수석'


그렇게 한 수석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농민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협상을 할 수는 없었다. 중국이 응해줄 리도 없고, 국제적으로 망신만 살 일이니까 말이다. 정작 농민들을 주저 앉힌 것은 월드컵이었다. 월드컵 4강만 아니었으면 더 높은 사람이 자리를 내놔야 했지도 모른다.

마늘파동은 우리나라 외교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외교관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이 사태의 진짜 원인은 더 근본적인데 있었기 때문이다.

제3차 마늘파동이 한창 진행중이던 2002년 7월 20일 제주도 애월체육관. 민주당 지구당 개편대회가 열린다. '리틀DJ'라는 한화갑 당시 민주당 당대표가 참석해 축사를 했다. 축사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 지역구인 전남 무안·신안군이 전국 마늘 생산의 25%를 차지합니다. 2000년 중국산 마늘에 대해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취한 것도 내가 주장한 겁니다."(동아일보 보도, 2002. 7. 22)

이건 또 뭔소리?
 
다시 제1차 마늘파동이 터졌던 2000년으로 돌아가자. 그 해 4월 정국은 총선을 2개월 앞두고 표심을 얻기 위한 정책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당이었던 민주당 선거대책위가 '획기적인 안'을 내놓게 된다. 중국 산 수입 마늘에 대한 긴급 관세 부과하자는 방안이었다. 농민을 생각한 공약이었다. 민주당은 당정협의도 거치지 않은 채 밀어붙인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어쩔 수 없었다.

무릇 정치인들은 '표'를 먹고 사는 존재다. 선거만 다가오면 '표 이익'만 따지지 국가 이익은 뒷전이다. 결국 총선을 10일 앞두고 세이프가드가 발표됐다.  '농민표를 의식한 정치적 결정'이라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마늘 파동의 원인(源因)은 정치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마늘협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한 관리는 필자와도 친하다. 외교관 초년 시절 마늘 파동을 겪었던 그는 마늘 협상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웠다고 말한다. 베이징에 허름한 술집에서 백주를 마시던 그가 이렇게 말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파의 이익만을 고려한 잘못된 정책이 얼마나 참단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현장에 있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첫 스탭이 꼬이니 외교관들도 제대로 역량을 펼 수가 없다. 일이 터진 후에도 문제였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고통을 감내하고라도 죽기살기로 달려들겠다는 국민적 결기가 있어야 했지만 우리 국론은 금방 분열됐다. 너무 맷집이 작았다. 핸드폰 수출이 막히면 곧 나라 경제가 망할 것이라며 호들갑을 떤 언론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더한다.
 
 외교건, 전쟁이건,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 내 진영을 가다듬지 않고, 무턱내고 나가 싸우면 백전백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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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은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