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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나를 뒤흔든 책]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심플하게 산다 … 을미년의 쉼표들

2015년의 마지막 ‘책 속으로’ 지면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각 분야 책 많이 읽기로 유명한 여덟 분께 올 한해 읽은 책 중 단 한 권을 골라달라 부탁했습니다.

이 분들이 추천한 여덟 권의 책은 출판계를 뒤흔든 대작도, 베스트셀러도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에 강렬하게 다가가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누군가에겐 삶을 바꾸는 ‘마법의 주문’을 선물했습니다.

좋은 책은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이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합니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한번 꼽아보시면 어떨까요. 올 한 해 내 마음을 크게 뒤흔든 한 권의 책은 무엇인가요.


어둡고 낮은 곳에 살던 시인
그때 만난 이 땅의 하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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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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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지음
녹색평론사, 315쪽
1만4000원


올 한해 나는 참 많은 말들과 사람들과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을 믿었다. 믿음이 깨지지 않은 말도 있었고 믿음이 더 두터워진 사람도 여럿이었으며 내 생각처럼 다가온 시간들도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경우에서 내 믿음은 해지고 무너지고 깨어졌다. 딛는 마음, 마음마다 폐허 같았다.

 이럴 때 내가 자주 펼쳐보는 책이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이다. 기독교와 신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권정생 선생의 유년은 폐결핵과 가난, 늑막염과 외로움으로 길게 이어졌다. 그는 나무장수였고 고구마장수였고 담배장수였고 재봉틀 가게의 점원이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는 그런 일마저도 하지 못하고 거지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시기 그는 이 땅의 숱한 하느님들을 만난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찾아갔지만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준 점촌의 한 식당주인,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에 물을 길어와 먹여 주던 노인, 뱃삯이 없는 것을 알고도 배를 태워주던 사공….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다.”(60쪽)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돕는 것은 결국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은 이후 권정생 선생의 『몽실 언니』 『강아지똥』 등의 아름다운 문학작품 속으로 녹아든다. 또한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작은 흙집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연간 1억 원에 달하는 인세를 모두 기부했던 소박하고 정한 삶으로도 이어졌다.

 길가에 놓인 강아지똥이 민들레 새싹을 품어내듯, 이 마음의 폐허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다시 믿음을 쌓아올릴 것이다. 믿음은 밝고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어둡고 낮은 곳에서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새해가 온다. 마음속에 새로운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내기에는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삶을 슬쩍 들여다보는 눈길
얼마나 기민하고 예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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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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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지음
이선혜 옮김
현대문학, 616쪽
1만6000원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 자신을 ‘어쩌다 장편소설을 쓰는 단편 작가’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까지 여기게 되었는데, 이 표현은 윌리엄 트레버로부터 배운 것이다. 현대 단편 소설의 거장이라 불리는 윌리엄 트레버는 단편소설이란 “누군가의 삶 혹은 인간관계를 슬쩍 들여다보는 눈길”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그 슬쩍 들여다보는 눈길이 얼마나 기민하고 예리한지, 그만 깜짝 놀라서 600페이지쯤 되는 이 책을 다 읽고도 바로 처음부터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 발견하게 된 것은 상처와 멍으로 얼룩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작가가 숨겨놓은 불가사의한 위로와 가능성들.

‘그 시절의 연인들’을 표제작으로 이 책에는 윌리엄 트레버를 대표하는 단편이 총 스물두 편 실려 있다. 낯선 자들이 세상물정에 어두운 한 집안을 서서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야 마는 ‘호텔 게으른 달’, 만족스러운 아내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였지만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마침내 참담함에 빠지고 마는 딕비헌터 부인의 이야기 ‘오, 하얀 뚱보 여인이여’, 문장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산피에트로의 안개나무’ 등. 오해 받거나 소외당한 사람들, 외로움과 슬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리고 고독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작가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단어, 최소한의 장면들로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십 년째 소설을 쓰고 읽는 걸 직업으로 가진 나는 이 책을 연거푸 세 번이나 읽고 나서는 마치 위대한 글쓰기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단편소설 쓰기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고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단편소설이 갖춰야 할 미덕 중 하나는 생의 어떤 경이로움을 넌지시 보여줘야 한다는 것 또한. 그래서 『윌리엄 트레버』는 아직도 내 머리맡에 있고 그것은 건강을 위해 좋은 음식을 찾아먹는 것과도 같은, 당연하지만 특별한 일이 돼버렸다.



월가와 싸운 파산법 전문가
60세 정계 데뷔, 상원의원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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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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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기회
엘리자베스 워렌 지음
박산호 옮김
에쎄, 548쪽
2만2000원


『싸울 기회』는 엘리자베스 워렌 미 상원의원의 자서전이다. 그녀의 삶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여자는 대학 갈 생각도 못하던 가난한 오클라호마 시골 가정에서 자라 19세 때 결혼, 아이를 키우다가 늦깎이로 로스쿨에 진학했다. 파산법 전문가가 되어 하버드 로스쿨 교수가 된 후에도 젊은 날의 자신처럼 가난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개인파산 제도를 강화하고 소비자 금융을 규제하고자 월가의 금융자본가들과 싸웠다. 파산부에 근무하면서 그녀의 명저 『맞벌이의 함정』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던 나는 2006년에 그녀의 수업을 한 학기 동안 듣는 행운을 누렸다. 그녀의 수업은 열정적이고 현실에 밀착해 있었다.

 오바마 정부를 설득하여 ‘소비자금융보호국’을 창설, 복잡한 대출계약서 때문에 서민들이 예상치 못한 변동금리와 연체이자로 집을 날리지 않도록 읽기 쉬운 단 한 장짜리 표준 대출계약서 양식을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는 등 활약하던 그녀는 남들 은퇴하는 60세가 넘어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되어서는 오히려 보다 직접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여 싸우고자 정계에 투신한다.

 상원의원 선거운동 후 늦은 밤에 귀가하러 지하철역에 서있는데, 마른 체구의 청년이 와서 워렌 씨 아니냐며 말을 건다. 청년은 학비를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니고 여름방학에는 투잡을 뛰는 대학생이다. 그는 말한다. “전 매달 당신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있어요. 그리고 후원금을 보내려고 일을 더 많이 하고 있어요.” 이 말을 듣자 워렌은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했다. 토요일밤 11시까지 일하는 이 아이가 내게 돈을 보내고 있다고? 후원금은 안 보내도 된다고 그럭저럭 선거운동은 잘 되고 있다고 청년에게 말한다. 그러자 청년은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니에요, 저도 이 선거에 참여하고 있어요. 이건 내 싸움이기도 해요.”

 그녀의 싸움은 전염된다. 워렌은 선거유세 중 어린 여자아이를 만날 때마다 아이 손을 잡고 이렇게 얘기했단다. “난 엘리자베스란다. 상원의원 선거에 나왔어. 그게 바로 여자가 할 일이거든.”


잘 죽는 기술이 필요한 시대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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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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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400쪽, 1만6500원


현대의학 발달의 장단점이 무엇일까. 내 생각에 장점은 수명의 연장이고, 단점도 수명의 연장이다. 2014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여자 84세, 남자 78세로 1990년의 76세와 68세와 비교해 10년 가까이 늘어났다. 짧은 기간에 벌어진 수명연장은 꼭 축하할 일만은 아니다. 특히나 열심히 살며 앞만 보고 뛰어온 한국인들은 늙음과 독립성의 붕괴,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전혀 해놓지 못했다.

 그 결과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은 1990년 이후 14.3명에서 69.8명으로 4.9배 증가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의존적 노인의 삶을 견뎌낼 의지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올 한해 가장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었다. 외과의사이자 미국 유력 주간지 뉴요커의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자신의 처할머니와 아버지가 늙어가면서 서서히 독립성을 잃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미국의 노인정책과 요양시스템을 취재했다.

죽음의 과정은 씩씩하게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던 노인이 그게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후 요양원과 어시스턴트 리빙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추적하며 주변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미국의 예를 보여준다.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해 ‘내려놓기’를 해야하는 것의 중요함을 설득력 있게 써내려갔다. 또 아버지의 투병을 쫓아가며 오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공격적 수술과 무리한 치료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사이자 아들로써의 고민을 담았다.

 그는 중요한 것은 생명연장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단계를 자신이 제어하고 있다는 통제감이고 이를 통해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현대인에게는 잘 사는 기술뿐 아니라 죽는 기술(ars moriendi)이 필요함을 의사의 전문성과 개인적 경험, 그리고 칼럼니스트의 필력을 합쳐 제안하고 있다. 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언제 내 눈앞에 닥칠지 모르는 늙음과 죽음을 마음 안에 현실적으로 담아둘 준비를 위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생기 있는 몸, 풍요로운 마음
가볍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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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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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하게 산다
도미니크 로로 지음
김성희 옮김
바다출판사, 240쪽
1만2000원


바쁘다는 핑계로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서재 여기저기가 어지럽다. 열려 있던 서랍을 미처 보지 못하고 일어섰다가 세차게 부딪쳤다. “아야!” 그 바람에 다리에 피멍이 들었다. 부끄러워서 더 이상 소리도 지를 수 없다. 한참동안 아픈 다리를 움켜잡고 나서야 겨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참 어지럽다. 여기저기 대충 자리 잡은 원고뭉치들과 기우뚱한 책들이 삐져서 돌아앉은 모양새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났다. 정리가 안 돼서 정신이 없는 것인지, 정신이 없어서 주변이 어수선한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달력을 보니 어느덧 연말이다. 정리가 필요한 때가 왔다. 2015년 희망의 시작을 알린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마무리라니. 올 한해 내내 마음을 놓치고 살았던 건 아닐까, 순간 아찔해진다. 아무튼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마무리라도 잘 해야겠다. 줄 건 주고 비울 건 비우고 나눌 건 나누면서 말이다. 또 받을 게 있으면 받고, 채울 게 있으면 그것도 채워야겠지.

 출가자들은 늘 이렇게 12월의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 내 소유의 무게, 내 인연의 무게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 유연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삶을 가장 가볍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심플하게 살기’다. 그것이야말로 우아한 모습으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아름답게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보다 훨씬 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이 와 닿는다. 특히 이 책은 적게 소유하는 것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무엇을 버려야 하고 가져야 할지 그 판단기준을 가르쳐준다. 어떤 몸과 마음상태를 유지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해준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몸을 생기있게 만들고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도 담아낸다. 진정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싶은 그대라면 이 책을 권한다.


“삶은 권태와 공포를 오가는 추”
암병실서 ‘어린 철학자’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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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소설가·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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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400쪽, 1만4000원


두 권의 산문을 내고 한 권의 소설을 준비하면서 한 해가 훌쩍 갔다. ‘쓰기’ 못지 않게 ‘읽기’도 일상의 일부였을 텐데 되레 선명하게 기억하는 책은 비일상 속에서 읽었던 한 권의 책이었다.

 올해, 2015년이 되자마자 갑상선암이 다섯번째로 재발되어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재발이 많이 되는 경우도 흔치 않다는 이상한 칭찬을 들으면서 예상치 못한 입원을 했다. 그리고 수술 전과 후, 병원에서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읽었다.

 『파이 이야기』는 사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다. 주인공이 청소년이고(난 어른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동물들이 등장하고, 판타지 요소도 있고, 인도인의 이야기(인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였다. 그러나 역시 ‘무엇’이 아닌 ‘어떻게’의 문제였다. 간결한 문체와 흡입력 있는 전개, 생생한 묘사는 독서가 본디 너무도 즐거운 행위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주인공의 절박한 마음과, 동반자인 뱅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에 대한 주인공의 애증심리는 복잡한 수술을 앞둔, 이십년 넘게 같은 병과 공존해온 나를 깊이 흔들어놓았다.

 병실에 있는 게 답답해서 틈날 때마다 도망갔다. 세브란스 병원의 암센터 건물과 본관 건물을 이어주는 오십 미터 통로에 놓인 2인석 소파였다. 앞자리에는 민머리에 털모자를 쓴 어린이와 그의 어머니가 휠체어를 옆에 세워둔 채 장난을 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햇살이 좋네’라며 창문을 통해 일광욕을 하면서 나는 중간중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파이 이야기』를 계속 읽어갔다.

 “상황이 좋을 때는 기분이 처지고, 상황이 나쁠 때는 기운을 낸다”

 “우리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추다.”

 어린나이에 생사의 기로에 놓인 ‘파이’는 철학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밤 열 시에 병실 전체가 소등되면 마치 비행기 안에서 그러듯이, 내 자리쪽 조명만 조용히 켜고 『파이 이야기』를 마저 읽었다.


불통 사회, 통계물리학의 처방
사랑한다면 뒷담화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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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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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물리학
김범준 지음
동아시아, 280쪽
1만4000원


물리학자는 말한다. “표준적이고 전통적인 물리학에는 ‘지금, 여기’란 없고, 물리학 논문에는 ‘나’가 없다.” 왜? 물리학에는 시간과 공간과 인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어디 물리학만의 이야기이겠는가. 모든 과학은 보편성이라는 명분으로 특별한 공간과 시간과 상황에 놓인 인간의 문제에서 눈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물리학자 김범준은 『세상물정의 물리학』에서 통계물리학이라는 틀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허니버터칩의 성공이나 교통 체증과 전염병 확산 같은 다양한 현상을 주목한다.

 진단이 과학적이면 처방이 지혜로운 법이다. 김범준은 뒷담화를 권한다. 일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때가 맞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골든 타임’을 운운하는 많은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주장한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상명하복 구조가 있을 때보다 계층을 넘나드는 의사소통이 활발할 때 더 강한 ‘때맞음’이 발생한다. 따라서 의사결정이 일방통행식으로 이뤄지면서 잘못된 결정이 반복된다면 구성원들은 뒷담화를 해야 한다. 가정과 직장과 국가를 사랑한다면 뒷담화를 풍성하게 해야 한다.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누가 어느 편에 설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대강 사업에 찬성한 사람은 무상급식에 반대하고 국정교과서에 찬성한다. 이들이 투표하는 정당은 정해져 있다. 반대 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진단하는 수단이 없기 때문에 단순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홍준표 도지사가 비용을 이유로 진주의료원을 폐쇄하자 진보 진영은 비용 외적인 이유로 반대했다. 그런데 김범준 교수 진단에 따르면 바로 그 비용 때문에 폐쇄가 부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치는 우리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적인 결정을 할 때 우리가 평소 그렇게 울부짖던 인문학이나 과학은 배제했다. 『세상물정의 물리학』은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하기 위해 물리학이 필요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이다.


고통에 꺾이지 않는 마법 주문
“틀림없이 다른 길이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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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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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푸른숲, 302쪽, 1만6000원


책을 읽고 나면 반드시 ‘마법의 주문’을 하나씩 챙긴다. 세상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때마다, 인생의 축이 뒤틀릴 때마다, 몸이 고통으로 괴로워할 때마다, 앞날이 비애와 슬픔으로 가득 찰 때마다 스르르 떠올라서 마음에 힘을 붙여주는 구절 하나.

 “틀림없이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에서 만난 ‘마법의 주문’이다. 마음에 칼이 선 상태로 사람은 무엇도 할 수 없다. 뾰족한 끝이 자신을 찌르고 친구마저 베기 십상이다. 삶의 의미가 돈에 먹혀버린 실망과 공허를 이기지 못할 때, 방송국 소개로 이 책을 만났다. 붓다 의 수행을 따라가면서 눈의 비늘을 조금씩 떼어낼 수 있었다.

 고타마는 삶이란 기쁨보다 슬픔에, 즐거움보다 괴로움에 가깝다고 말한다. 삶의 무게를 기쁨에 두기에 사람들은 쾌락을 좇아 자기 몸을 불사르고, 즐거움에 두기에 작은 어려움에도 고꾸라진다. 삶이란 생로병사의 업을 등에 진 고통의 연속임을 통찰해야, 이 헛되고 무력한 삶을 해탈해서 또 다른 삶을 살아보려는 거룩함에 대한 갈망에 진지해진다. 괴로움의 한가운데에서 마음에 고요한 중심을 마련해 깊은 평화를 체험할 수 있다.

 “틀림없이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한 갈망 속에서 온갖 스승을 만나 수행을 전전했으나 끝내 깨달음을 얻지 못한 고타마는 한때 좌절했지만 곧바로 일어서서 스스로 길을 찾기로 결심하면서 말한다. 무문(無門)의 문(門)을 열고, 길 없는 길을 떠났다. 그때 불현듯 마음의 북소리가 들렸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갈증이 해일처럼 일어섰다. ‘일하려고 읽는 삶이 아니어야 한다. 책을 읽으려고 일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자 온몸의 피가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고타마는 “새로운 인간이 되는 방법”을 만들어내려 했다. 슬픔 속에서 기쁨을, 괴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발명하려 했다. 우리 비루한 현대인들은 환멸과 절망에 지쳐서 자신한테 폭력을 휘둘러 스스로를 파괴한다. 고타마는 세상의 고통에 지지 않는 ‘마법의 주문’을 선물했다.

“틀림없이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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