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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황장엽, DJ 때 국정원에 살해 위협 느껴 … 미 망명도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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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 당 자료실 부실장은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에 망명한 지 67일 만인 1997년 4월 20일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중앙포토]


황장엽 망명의 비밀을 간직해온 북한 노동당 간부(당 중앙위 자료연구실 부실장) 출신 김덕홍(67)씨가 입을 열었다. 김씨는 17일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주체사상이 김일성·김정일이 아닌 자신의 작품이라고 한 황 전 노동당 비서의 실언이 망명의 도화선이 됐다”고 밝혔다. 서울 강남의 안가에서 칩거하고 있는 김씨가 언론과 인터뷰한 건 2003년 7월 이후 처음이다.

 그는 “1997년 2월 망명 때 김영삼(YS) 대통령은 친서를 보내 황장엽을 장관급으로, 김덕홍은 차관급 예우를 해주고 북한 민주화 활동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김대중(DJ)·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지켜지지 않았다”며 “황 전 비서는 생전 김대중 정부의 국가정보원을 ‘적(敵)’이라고 지칭했고, 국정원이 자신을 살해할 것이란 위기감에 미국 망명까지 고려했다”고 증언했다. “형님(황 전 비서)은 2001년 7월 3일 ‘적(국정원)들이 우리를 살해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조건에서 미국 망명과 언론 공개 투쟁의 두 가지 방법 중 선택이 필요하다’는 서한을 내게 보냈다. 엿새 뒤엔 ‘적과의 흥정이 어렵다’는 글도 보냈다”고 김씨는 소개했다. 당시는 제시 헬름스 상원 외교위원장 등 미 유력인사가 황 전 비서를 미국으로 초청했으나 국정원이 남북관계 악화를 이유로 반대해 마찰을 빚던 때다. 황 전 비서는 2010년 10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김씨의 회고록 『나는 자유주의자이다』(집사재 출판사) 발간을 계기로 이뤄진 이번 인터뷰는 경찰 경호팀의 신변보호 아래 이뤄졌다. 다음은 문답 주요 내용.

 -황장엽 망명을 촉발한 진짜 이유가 뭔가.

 “9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국제토론회에서 황 전 비서는 ‘주체사상은 김일성·김정일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란 발언을 했다. 이를 보고받은 김정일이 분개했다. 6월 중순 황 전 비서는 ‘김정일이 나를 그냥 놔둘 것 같지 않다. 욕보기 전에 자살할 수 있게 독약을 구해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황 전 비서가 먼저 망명하자고 권유했나.

 “아니다. 당내 여러 지인이 ‘황 비서를 김정일 손에 희생되게 놔둘 수 없다’며 정치망명을 결의했다. 나는 ‘목숨을 끊지 말고 남조선에 나가 김정일을 반대하는 투쟁을 하라’고 설득했다. 황 전 비서가 ‘김덕홍 동생이 같이 가지 않으면 서울에 안 가겠다. 남조선과 연계를 가지는 문제는 동생이 책임지라’고 버텨 함께 오게 됐다. 북한 당 간부들이 ‘혼자서는 상점도 못 찾아가는 황장엽이 망명한 건 전적으로 김덕홍 때문’이라고 평가했다는 걸 듣고 자부심을 느꼈다. (내가 황 전 비서의 망명을 이끌어낸 건) 조선(造船)을 한 사람이 폐선(廢船)을 해야 하는 이치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는 어떻게 접촉이 이뤄졌나.

 “비밀공작이 있었다. 본래 97년 4월 망명하려 했는데 그해 1월 말 도쿄 주체사상토론회 때 접촉한 한국 정보기관 관계자가 ‘언론이 알아챈 것 같다’며 종용했다. 황 전 비서가 토론회를 마치고 일본에서 베이징으로 온 2월 12일 오전 10시 함께 한국영사관으로 들어갔다.”

 -당 중앙위 자료실 책임자로 많은 북한 비밀문건을 접했을 텐데.

 “김정일은 84년 9월 대남 평화공세를 위해 쌀 5만 석과 시멘트 10만t 등 수해물자 지원을 제의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이 덥석 수용해 (북한에) 난리가 났다. 89년 말 비공개회의에서 김정일이 ‘남조선에 구호물자로 보내려 쓴 전쟁물자를 아직도 보충 못했다. 그때부터 경제가 허리를 펴지 못하게 됐다’고 개탄했다는 서류를 본 적이 있다.”

 -핵 개발과 관련한 정보도 있었나.

 “영변 핵단지의 과학자들이 핵 개발 돌파구를 여는 연구성과를 얻었다는 게 91년 4월 김정일에게 보고됐다. 김정일은 전병호 군수공업담당 비서에게 ‘오늘은 내 평생 소원이 풀리는 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듬해 2월 김일성은 ‘동족을 말살하는 핵을 개발한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황 전 비서는 김일성 사후 200만~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했는데.

 “노동당 자료연구실 부실장 시절인 96년 11월 아사(餓死)자 통계자료를 봤다. 95년에 당원 5만 명 포함 주민 50만 명 아사, 96년 11월 상순까지 1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국정원과는 여전히 불편한 관계인가.

 “이젠 그렇지 않다. 지난해 9월 명예회복 인증서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과 대통령께 감사한다는 말을 기사에 빼먹지 말아 달라.”

 -한때 황 전 비서와 등을 돌리고, 빈소도 찾지 않았는데.

 “국정원에 회유당해 주체사상연구소에 집착했던 그에게 내가 반발한 거다. 망명 후 황 전 비서가 주체사상 같은 철학에 매달리지 말고 김정일 전면비판 투쟁에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망명 자체가 위대한 사상 전향이자 반(反) 김정일 투쟁이란 걸 최근에 깨달았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보고 싶어 밤마다 오열한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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