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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기업들 영업직도 R&D … “세계 최초 아니면 생존 못해”

세계 1위 SPI(전자기판 납땜 분포 검사장비)업체인 고영테크놀러지의 경기도 광명 공장에서 엔지니어가 SPI 기기를 만들고 있다. 고영은 세계 최초로 3차원 방식의 SPI를 개발해 시장을 독점했다.

지난 21일 오전 10시40분 세계 1위 SPI(전자기판 납땜 분포 검사장비) 업체인 고영테크놀러지의 경기도 광명 공장. “이게 공장인가요?” 아무리 봐도 기자에게는 덩치 큰 기계 10여 대만 덩그렇게 놓인 커다란 창고 같았다. 환한 불빛과 쾌적한 공기가 창고라기보다 빈 사무실 같기도 했다. 작업복을 입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수많은 생산 인력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무인(無人) 공장인가 싶었지만 컨베이어 벨트도 보이지 않았다. 엔지니어 이승민(29)씨가 “이 기계가 우리가 만드는 제품”이라며 “나처럼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공장 생산팀”이라고 했다. 826㎡(250평)당 4~5명꼴로 근무하며 전체 생산 인력은 20명 정도에 불과하다. 모두 이씨 같은 엔지니어다.

 몸체를 협력업체에서 조립해 오면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실험을 반복하며 섬세하게 부품을 조정해 대당 2억5000만원까지 하는 검사장비를 완성한다. 고광일(58) 고영테크놀러지 대표는 “생산직은 물론 영업직도 연구개발(R&D) 인력 출신”이라 고 말했다. 이 회사는 연구원이나 생산직이 모두 같은 연봉 체계다.

 세계 첫 스마트폰형 산업용 단말기를 내놓은 블루버드의 경우는 직원의 70%가 R&D 인력이다. 이장원(47) 블루버드 대표는 “우리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가 아니다. 독자적인 상품을 파는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세계 최초, 세계 유일 제품을 계속 내놓지 않으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블루버드는 자동인식·결제 통합단말기와 윈도 체계 단말기 영역에서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R&D에 집중 투자해 기존에 없던 시장을 만들어 내는 것. 중소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자체 브랜드로 독자 생존하기 위한 정석이다. 1977년 협신의료기상사로 시작한 대구 기업 JVM의 경우 세계 최초로 전자동 약품관리 시스템을 개발해 북미·유럽 시장을 70% 이상 차지했다. 처방약을 약사가 일일이 손으로 포장할 필요 없이 약의 분류부터 포장·인쇄까지 기계가 하도록 만들어낸 덕분이다. 유산균 바이오업체 쎌바이오텍은 세계 최초로 유산균을 이중 코팅하는 법을 개발해 글로벌 5위권으로 뛰어올랐다.


 자체 브랜드 없이 세계 1위로 성장한 중소기업들도 있다. 국내 대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커가면서 매출이 크게 늘어난 부품업체들이다. 김기찬 세계중소기업학회장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만들어 낸 것은 대한민국 산업의 허리를 떠받친 중소기업들”이라면서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대기업이 시장을 조성하고 이끌어갔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이 부품 업체에 끊임없이 품질 향상과 가격경쟁력을 동시에 요구했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납품 업체가 세계 시장에서 어깨를 견줄 만한 경쟁력을 길렀다는 분석도 나온다. 78년 일진단조로 출발한 일진글로벌의 경우 2000년 3세대 자동차용 휠베어링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이 분야 세계 1위다. 현대차는 물론 GM·BMW·포드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에 부품을 수출하고 있다. 67년 동양정공사로 시작해 엔진 피스톤 제조 외길을 걸어온 동양피스톤 역시 아우디·크라이슬러·미쓰비시자동차 등에 납품하는 세계 4위 업체로 성장했다.

 첨단 정보기술(IT)을 바탕으로 전자산업 분야 대기업의 주력 업종이 바뀌면서 중소기업의 세계 선두권 품목도 달라졌다. 평판디스플레이 제조용 장비(제우스), 노트북·태블릿PC용 프리즘시트(LMS), 스마트폰용 카메라 렌즈(세코닉스) 등이다. ‘IT 강국 코리아’라는 기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사업영역을 개척하기도 한다. 코나아이는 교통카드 등 IC 칩을 탑재한 ‘스마트카드’ 사업에 뛰어들어 세계 4위로 성장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금융과 기술을 결합한 핀테크 시장에도 진출했다. 다양한 종류의 신용카드를 여러 개 골라 모바일로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결제시스템 ‘코나페이’다.

 60~70년대 중소기업 수출을 견인했지만 인건비 증가로 중국·동남아시아 업체에 밀렸던 가발이나 섬유 분야에서도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강소기업이 나타나고 있다. 전북 완주에 있는 우노앤컴퍼니는 인조 가발 원사 시장 세계 3위다. 사람의 모발보다 저렴한 합성 원사 가발은 지나치게 짧고 잘 빠지는 고수머리 때문에 가발을 많이 쓰는 아프리카가 큰 시장이다. 우노앤컴퍼니는 최근 세계 최초로 흑인 여성 가발용 친환경 원사를 개발했다. 벤텍스는 1초 만에 물이 마르는 섬유, 여름에도 시원한 냉감 소재, 겨울에 보온 효과가 있는 발열 소재 등으로 나이키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공략했다.

 이처럼 ▶글로벌 단위 시장 규모는 크지만 ▶국내 대기업이 진출해 경쟁할 정도는 아니면서 ▶진입 장벽은 높아 후발 업체의 추적을 차단할 수 있는 틈새 시장을 차세대 중소기업들이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공략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기존 해외 업체가 기술 침해 관련 소송을 거는 등 글로벌 텃세도 만만치 않다. 벤텍스처럼 승소로 끝난 경우도 치른 비용이 컸다. 이정동 서울경영정책대학원 교수는 “정부는 단순히 여러 기업에 지원 자금을 뿌리지 말고 능력 있는 중소기업에 재원을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준술(팀장)·함종선·문병주·구희령·황의영·한진·김기환·임지수 기자 jsool@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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