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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이 뚫렸다 … 호주 4인조 원정대 '낙서 습격사건'









힙합 모자와 후드 티 차림의 백인 네 명이 서울 왕십리역에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달 2일 오전 3시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들은 버스정류장 뒤쪽 지하철 환풍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쇠톱과 절단기로 환풍구 덮개를 연 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이들이 마침내 ‘목표물’과 마주쳤다. 임시 차고지(주박지·主縛地)에서 첫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5호선 지하철 차량이었다. 이들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차량 측면에 ‘KLUE’란 대형 그래피티를 그린 뒤 유유히 역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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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십리역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들은 이틀 후 안암역에서도 같은 행동을 했다. 환풍구를 통해 침입하는 수법과 시간대는 동일했다. 6호선 차량 측면에 ‘FEDUP’이란 문자를 남겼다. 알파벳 F는 좌우를 바꿔 그렸다. ‘fed up’은 우리말로 ‘지긋지긋한, 신물 난’이란 뜻이다. 그 다음날(5일)엔 신논현역을 타깃으로 삼았다. 9호선 차량 측면에 ‘ERROR’를 그렸다.

 서울 지하철역 곳곳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들은 입국 열흘 만인 지난달 7일 호주로 출국했다. 경찰이 폐쇄회로TV(CCTV) 등을 통해 이들의 신원을 A(26)씨 등 호주인으로 확인했을 땐 이미 이들이 한국을 떠난 뒤였다. 성동경찰서 관계자는 “한국에 처음 입국한 외국인들이 어떻게 지하철 역사 내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출국한 다음인 같은 달 13일에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도 군포시 금정역에 들어간 범인들은 그래피티 왼쪽에 검은 스프레이로 ‘CRUDE’란 단어를 남겼다. 경찰은 “‘CRUDE’란 태그네임(Tagname)을 쓰는 이가 저지른 범행”이라고 말했다. 태그네임이란 자신의 작품임을 뜻하는 일종의 낙관(落款)이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금정역 사건의 범인은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지하철 차량에 그래피티를 그리는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국토교통부 산하 철도특별사법경찰대에 따르면 2013년 1건에 불과하던 지하철 차량 그래피티 사건이 지난해 12건으로 늘어났다. 올해에만 벌써 4건째다. 지난 1년4개월 동안 지하철 역사 17곳이 뚫린 것이다. 이젠 그래피티 사건만 맡는 담당 수사관이 있을 정도다.

 철도경찰대 김현모 수사관은 “대부분 외국인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차량에 남긴 그래피티들을 분석한 결과 호주와 캐나다 등에서 활동하는 ‘크루(Crew·모임)’의 것으로 조사됐다. 글씨와 색깔 등 그래피티 스타일도 국내에선 볼 수 없는 형태라고 한다.

 이들은 왜 한국까지 와서 지하철 그래피티를 그리는 걸까. 전문가들은 우선 그래피티 문화에서 지하철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세대 그래피티 작가인 임훈일(40)씨는 “자신의 그래피티가 그려진 열차가 도시를 달리는 건 최고의 영예”라고 말했다. 그래피티 세계에선 지하철 차량을 최적의 표현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지하철의 경우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피티 원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한 그래피티 작가는 “그래피티 활동 경력이 있는 외국인이 입국 후 외국어 강사 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에게 서울의 지하철을 알렸을 수도 있다”고 했다.

 지하철 그래피티로 경찰에 붙잡힌 외국인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다. 범행을 저지르고 열흘 안에 한국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적용되는 재물손괴죄는 중요 범죄가 아니어서 신원을 확인해도 국내 송환이 힘들다. 김현모 수사관은 “해외 그래피티 크루들 사이에서 국내 지하철에 관한 정보가 공유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왕십리역(4건), 금정역(3건) 등에 범행이 집중 발생했다.

 이에 따라 관련 기관엔 비상이 걸렸다. 연이은 지하철 역사 침입을 막을 안전대책을 세우고 있다. 서울도시철도공사 측은 사건 발생 직후 157개 역(5~8호선) 전 구간에 대해 환풍구 덮개의 용접을 다시 했다. 임시 차고지 잠금장치도 보강하는 한편 4월 중 무인경비 용역 시스템을 설치할 계획이다. 코레일과 9호선 측도 “교대근무 조를 투입해 현장 순찰을 늘리겠다”고 했다.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그래피티=전철이나 건물 벽, 교각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 1960년대 말 뉴욕 브롱스 빈민가에서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소년들이 남긴 거리 낙서에서 비롯됐다. 미국의 팝아트 작가인 키스 해링은 그래피티를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발전시켰다. MC(랩퍼)·DJ·비보이와 함께 힙합 문화의 4대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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