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이준석 부인 "죄인이 무슨 말하나"…자택 비우고 지인집에

지난 19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취재진 앞에 선 이준석 선장. 작은 사진은 사고 전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모습을 캡쳐한 것 . [뉴시스]

“밀려드는 바닷물과 잔해 속에 갇힌 승객들을 외면한 채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는 ‘세월호의 악마(Evil of Sewol)’로 불리게 됐다.”
지난 19일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세월호 선장 이준석(69)씨에 대해 묘사한 기사다.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도주 선박의 선장 또는 승무원), 유기치사 등 혐의로 구속된 이씨는 책임회피성 진술로 일관하고 있다. ‘세월호 악마’ 이씨의 패륜적인 언행의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과거 행적과 주변을 나흘간 추적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중앙SUNDAY가 입수한 수사 초기 진술조서에도 간단한 인적사항만 기록돼 있을 뿐이다. 이씨는 “40년가량 선원생활을 했고 외항선 선원으로 20년, 연안 여객선 선장으로 20년을 일했다. 8년 전(2006년) 청해진해운에 선장으로 입사했다”고만 진술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그의 이력은 여기서 끝난다. 연안 여객선 선장 시절 지방언론과 한 인터뷰, 방송사 다큐 프로그램 출연 영상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본지 취재 결과 그의 고향은 경북 칠곡으로 20대에 선원생활을 시작해 32세이던 1977년 외항선 선원이 됐다. 17년간 외항선을 탄 뒤 연안 여객선 선장으로 다시 20년을 일했다. 탐문의 출발지는 그의 주소지로 돼 있는 부산시 동래구의 한 아파트였다.

95년 이후 청해진해운서 근무

지난 22일 밤. 그의 주소지인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등기부 조회 결과 이준석씨는 2006년 34평형짜리 아파트를 1억9900만원에 구입해 입주했다. 그가 청해진해운의 인천~제주 항로 여객선 선장으로 재입사한 시점이다.

이웃과 아파트 경비원들은 그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이사 온 지 2개월 됐다는 앞집의 50대 남성은 “할머니(이씨의 부인)는 가끔 봤는데 할아버지는 엘리베이터에서 잠시 마주쳤을 뿐 거의 보지 못했다. 뭐 하시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주야간 경비원들도 특별한 점은 없었다고 했다. 60대 경비원은 “아주머니 성함이 독특해 기억하고 있지만 자주 뵙진 못했다. 평범한 주부”라고 말했다.

어렵사리 이씨의 부인 C씨와 전화가 연결됐다. C씨는 부산의 지인 집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나. (이씨가 수감돼 있는) 목포에는 가지 않았다. 남편의 바깥일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C씨는 “몸이 많이 아파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 남편도 몸이 안 좋아 요즘 병원에 다녔다”고 했다.

C씨는 기자와 직접 만나는 것은 거부했다. 이씨에게 특별히 지병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몇 차례 통화한 C씨는 “누굴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한 뒤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파트 주변을 취재하던 중 C씨가 몇 년 전 활동했다는 산악회 간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C씨와 이준석씨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남편 분이 여객선 선장인 건 알고 있었어요. (세월호 침몰) 뉴스를 보고 설마 했는데 그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부인은 쾌활하고 평범한 할머니예요. 부인이 병으로 입원한 적이 있어 문병 갔다가 남편분을 만났는데 그냥 보통 아저씨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또 다른 산악회 회원과 전화 통화를 해 봤지만 비슷한 기억이었다. 그는 “꽤 가깝게 지냈었는데 이상한 종교를 갖고 있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생각으론 아예 종교가 없는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나 지방해양항만청 등 기관에선 이씨에 대한 개인정보를 확인해주길 꺼렸다. 탐문과 취재를 통해 이씨에 대한 몇 가지 공식 이력을 추가로 확인했다.

그는 알려진 대로 1985년 2급 항해사 면허를 취득했다. 외항선 선원생활을 마친 뒤 94년 국제대우개발에 입사해 연안 여객선 선장이 됐다. 이듬해인 95년 이씨는 청해진해운의 전신인 세모해운에 입사했다. 부산~제주 간 여객선을 운항했다고 한다.

‘오대양 사건’ 이후 세모해운이 부도 처리되면서 그는 잠시 회사를 떠났다. 선원들의 고용이력을 관리하는 한국선원고용복지센터 기록에 따르면 이씨는 다른 선사(船社)에서 일하다 2000년대 초반 청해진해운에 다시 들어와 인천~제주 간 여객선을 몰았다. 2003년에는 여수의 온바다해운에서 완도~제주 간 여객선 선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이 2006년 이 노선을 인수하면서 다시 청해진해운으로 복귀한다. 이씨가 해경 조사에서 “8년 전 입사했다”고 진술한 시점이다. 복지센터 관계자는 “이씨의 다른 고용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95년 이후 계속 청해진해운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간판 없는 교회 '이씨는 이방인'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일부 언론은 ‘청해진해운 직원 대부분이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신도였고 이 선장과 승무원들도 상당수가 구원파 신도’라고 보도했다. “‘구원될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구원파 교리에 따라 이씨가 적극적인 구난활동을 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지난 23일 부산시 해운대구 반여동의 한 아파트 상가를 찾았다. 구원파의 부산교회가 있다고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상가 외벽 어느 곳에서도 교회가 있음을 알리는 간판이나 표식은 없었다. 흔한 십자가조차 없었다.

낡은 상가 3층에 교회가 있었다. 복도를 마주한 채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예배당으로 보이는 큰 공간도 있었다. 문틈으론 작은 단상과 마이크, 피아노가 보였다. 바닥은 스펀지로 만든 매트가 깔려 있었다.

갑자기 중년 여성 몇 명이 올라오더니 잠긴 문을 열었다. 기자를 보곤 황급히 문을 다시 잠그고 뛰어가듯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다.

교회 관리를 맡고 있다는 한 여성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이씨와 가족이 신자인지 묻자 “그 사람들(이씨 가족)은 이방인”이라고 했다. ‘이방인’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신자라는 소문이 있다고 했더니 “예전 선장이 교인이었고, 이씨는 아니다”라고 했다. 세월호의 정규직 선장 신모씨를 말하는 것인지 물었지만 답하지 않았다.

구원파 교회는 300여 평 규모의 상가 3층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같은 상가에 입주해 있는 김모(54)씨는 “나도 다른 개신교회에 다니지만 특별한 점은 못 느꼈다. 다른 점이라면 목사 없이 비디오 같은 걸 틀어놓고 예배를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김씨는 “예전에는 교세가 커서 처음 한두 개 방을 쓰다가 층 전체를 매입한 걸로 안다. 전엔 교회 안에 신협도 있었고 건강식품도 팔았다”고 말했다.

복도에는 발신지가 경기도 안성으로 돼 있는 빈 택배상자가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유기농 헤모씨를 판매한다는 안내지도 붙어 있었다. 안성에는 구원파의 본거지인 ‘금수원’이 있다.

기독교복음침례회 측은 지난 24일 “이준석 선장은 교인이 아니다”라고 공식 부인했다. 교회 주변을 탐문했지만 이씨가 구원파 신도인지,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항로 단축하려다 맹골수도서 사고

부산~제주 간 여객선을 몰았던 이씨의 전력을 좇아 부산연안여객터미널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터미널에 입주해 있는 한 선사 임원은 “제주~부산 노선이 없어졌다가 다시 면허를 받아 예전에 일하던 사람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부둣가에서 만난 뱃사람들은 욕지거리부터 쏟아냈다. 한 60대 선장은 “그 때려죽일 놈이 뱃사람 자존심 다 뭉개놓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있던 중년의 화물선 기관사도 “세상에 선장 놈이 승객 버리고 도망가는 법은 없다”며 혀를 찼다.

이씨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전에도 몇 건의 해상사고에 연루됐다. 해양안전심판원의 재결서(판결문)를 입수해 당시 사고들을 분석해 봤다.
2003년 8월 이씨가 선장으로 있던 청해진고속훼리1호는 매물도 남단 5마일 해상(세월호 침몰지점에서 북서쪽 20㎞)에서 유조선 주연호와 충돌했다. 이 사고의 재결서에선 세월호 사고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재결서는 ‘항로 7마일을 단축하기 위해 설정된 통항분리대(상·하행하는 배의 항로가 겹치는 것을 막기 위해 정해놓은 권고항로)를 이용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좁은 맹골수도로 통항하려 한 것도 안전 운항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된다’고 기술했다.

2007년에는 이씨가 선장으로 있던 제주~인천 간 여객선 오하마나호가 충돌사고를 냈다. 오하마나호는 전북 군산 인근 해상에서 파나마 선적 오렌지스카이호를 추월하려다 충돌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교대로 근무하던 다른 선장이 운항 중이었다. 이씨가 대체선장으로 근무 중 세월호가 침몰한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재결서에는 ‘(조타수 없이) 당직 항해사 혼자 항해당직을 수행, 적절한 당직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적혀 있다. 청해진해운 소속 선박들의 당직체계가 엉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준석씨가 살고 있는 부산 동래의 한 아파트 전경.


여객터미널 부근에서 선박용 화물 배송업체 대표 이모(71)씨를 만날 수 있었다. 여객선 선장으로 30년간 근무한 뒤 은퇴했다는 그는 “내가 선장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고 했다. “오랫동안 배를 타면 그냥 기능인이 돼요. 머릿속으론 책임을 알고 있지만 무덤덤해지는 거지. 내 일은 그냥 배 잘 모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거든. 구명벌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구명조끼는 잘 싣고 있는지 잘 안 챙겨요. 나도 배 몰던 초기엔 신경 쓰였지. 그런데 나중엔 무감해지더라고. 회사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씨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씨 가족들을 ‘평범한 사람들’로 기억했다. 이씨가 잠시 몸담았던 전남 여수의 한 선사 전 직원 A씨도 “그냥 보통사람과 같은 양반”이라고 했다.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해요. 뱃사람들 중엔 개성 강한 사람도 많은데 이준석씨는 정말 평범합니다. 언뜻 봐선 배 오래 탄 사람이란 생각도 잘 안 들 정도니까요.”

25일 오전 C씨의 휴대전화가 다시 켜졌다. 한참 신호음이 간 뒤 전화를 받은 C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부산=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오피니언리더의 일요신문 중앙SUNDAY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패드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탭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앱스토어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마켓 바로가기


AD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