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의미의 민주화 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260p

1987년 6월은 뜨거웠습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습니다.
민주화 열망에 등 떠밀린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기본권과 언론자유 보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6ㆍ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정치는 발전했습니다. 보수ㆍ진보 진영은 세 차례 정권을 바꿔 잡았습니다.
경제는 팽창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에 육박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아우성칩니다.
OECD의 ‘더 나은 삶의 질 지수’ 평가에서 38개국 중 28위에 그쳤습니다.

30년 간 시민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웃들의 입을 빌고 통계를 덧대어 ‘그때’와 ‘지금’을 전합니다.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의미의 민주화 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260p

1987년 6월은 뜨거웠습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쳤습니다.
민주화 열망에 등 떠밀린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기본권과 언론자유 보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6ㆍ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정치는 발전했습니다. 보수ㆍ진보 진영은 세 차례 정권을 바꿔 잡았습니다. 경제는 팽창했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에 육박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아우성칩니다. OECD의 ‘더 나은 삶의 질 지수’ 평가에서 38개국 중 28위에 그쳤습니다.

30년 간 시민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웃들의 입을 빌고 통계를 덧대어 ‘그때’와 ‘지금’을 전합니다.

대학생

젊음은 꿈꿀 수 있는가

198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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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특권이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특권이었다”
87년 부산대 학생 강철오

군부독재가 한창인 1981년 부산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강철오(56)씨는 문학으로 독재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 앞 선술집에 모여 ‘사회를 위한 글쓰기’를 고민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다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취업은 할 수 있었다. 그런 환경은 대학생들이 정치ㆍ사회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던 버팀목이었다.

2017년 대학생

87년 졸업 후 경남 밀양의 한 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전국 교사협의회가 생겼고 그곳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대학시절의 고민을 사회에서도 이어갔다. 사명이라 여겼다”고 말했다.


-대학때 가장 큰 고민은 뭐였나.

“독재는 지속됐고 빈부격차는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도로서 어떤 글을 써야하는지 동기들과 함께 고민했다. 참여문학(사회참여를 목표로 쓰는 시ㆍ소설ㆍ수필)이 활발했고 공단에 위장 취업을 하는 동기들도 있었다.”


-사회참여의 원동력은 뭐였나.

“당시 대학생이 지금보다 드물었다. 대학생을 지식인으로 여기는 분위기였고, 자의식도 강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또래들에 대한 부채의식도 있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공부하겠다’는 생각과 행동은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것이었다.”


-취업 걱정은 없었나.

“군부정권의 독재로 정치ㆍ사회적 분위기는 참담했지만 경제 상황은 무척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직장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큰 특권이었다. 누구도 ‘스펙’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격증, 학점 등을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생계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운 덕분에 사회참여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기들은 졸업 후 어떤 경로를 택했나.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기업에 취업하하거나, 전공을 살려 글을 쓰는 직업을 선택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그리고 학생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공단 등에 가는 동기들도 있었다. 선택하는 길은 달랐지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만큼은 함께 공유했던 것 같다.”


-교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조금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교사가 되면 글쓰기와 직장 생활을 안정적으로 병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 당시만 해도 교사가 되는 게 그리 어렵지 않기도 했다. 87년 교사가 됐고, 그 이듬해에 전국 교사협의회가 생겼다. 일종의 학교 내 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절 교실 안에는 권위주의와 독재의 잔재가 짙게 남아있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전국 교사협의회 활동에 참여했다. 대학시절의 문제의식을 사회인이 되어서도 자연스레 이어간 것이다. 시대적 소명이라 여겼다.”


-요즘 대학생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헬 조선’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많은 대학생이 먹고 살 걱정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됐다. 대학생들의 잘못도 아닌데 오롯이 짐을 지고 있는 거다. 사회적 분위기가 이들을 몰아붙인 셈이다. 기성세대들은 ‘요즘 청년들은 편하고 보기 좋은 직장만 찾아 다닌다’는 비판을 하곤 한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본인의 자식들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지. 지금의 ‘헬 조선’을 만든 사람들은 누군지에 대해서 말이다.”

2017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다른 고민은 부수적이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다른 고민은 부수적이다”
17년 부산대 학생 신지인

“요즘 청년들도 사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진 않아요. 고민의 종류가 많아진 탓에 발화점이 높아졌을 뿐입니다.”

2017년 대학생

2013년 부산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신지인(23)씨는 80년대 대학생들처럼 한 목소리를 내기엔 처한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선배들은 ‘독재정권 타도’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위해 고민하고 싸웠지만,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민한다. 같은 대학생이라도 소득 등 환경 차이가 커 고민의 방향과 결도 제 각각이다. 그는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순응하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인문학을 전공한 동기들의 가장 큰 고민이 뭔가

“졸업을 앞둔 동기나 선배들의 1차 목표는 취업이다. 국문학은 대기업에서 선호하는 전공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대다수가 7급이나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다른 고민들은 부수적인 것이 돼 버렸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과거에는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들었다. 대학생도 지금보다 적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보장됐고, 대학생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역할도 비교적 뚜렷했다. 80년대 ‘독재 타도’라는 목표 아래 대학생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던 이유다.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졸업 후 밥벌이를 걱정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거악에 분노하기보다 스펙에 목매달 수밖에 없다.”


-취업 걱정이 적던 80년대가 부럽진 않나.

“취업이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당시에는 수업 시간에 사회나 정치를 비판하면 사복경찰이 험한 곳으로 끌고 갔다고 들었다. 말할 수 있는 자유라는 가장 근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던 거다. 당시의 시대상에 따라 선배들은 그들 나름의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을 테고 우리들은 우리 나름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요즘 대학생은 사회에 무관심이 하다는 비판이 있다.

“대학생들이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건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기성세대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사회문제 자체에 무관심한 건 아니다. 청년층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비춰지곤 하지만 친구들 대다수는 각자의 정치적 성향과 나름의 문제의식이 있다. 그러나 처한 상황이 제 각각이기에 목소리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온라인에서 주로 활동하기 때문에 오프라인에서는 두드러지게 표현되지 않을 뿐이다.”


-온라인에서 어떤 식으로 정치ㆍ사회적 움직임이 나타나는가.

“많은 대학생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고 이슈를 받아들인다. 게시물들을 통해 목소리를 모으고 고민을 구체화한다. 과거 대학생들의 시위나 당원 가입 등에 비해 소극적이라고 비춰질 수 있지만 고민의 깊이는 얕지 않다.”


-이러한 활동들이 구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청년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헬 조선’을 바꾸기 위해선 결국 제도권 안에서 청년들의 목소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과거에는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체제 전복을 외쳤다면 지금은 국회 안에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꾀해야 한다. 청년들 스스로 정치적 자산과 역량을 키워 이를 해결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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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

노동의 대가는 납득할 만 한가

198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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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7년을 일하면 내 집이 생겼다” 87년 대기업 직장인 이건원

이건원(62)씨는 80년대 초 럭키 엔지니어링(現 GS건설)에 입사했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이씨는 그의 말대로 ‘그리 어렵지 않게’ 대기업에 들어갔다. 23년간 근무하며 차곡차곡 모은 월급으로 서울 목동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두 딸을 길렀다. 그는 이를 ‘평균적인 대기업 직장인의 모습’이라고 기억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자녀와 또래들을 바라보는 이씨의 심경은 복잡하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한 꿈이 됐다”며 “기성세대가 자식 세대를 위해 고통을 분담할 때”라고 말했다.


1987년 근로자

-당시에는 취업난이 없었나.

“학과 사무실에 가면 기업 원서가 쌓여 있었다. 서너 곳에 지원하면 두세 군데서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다. 대학 수가 적기도 했지만, 당시는 경기가 워낙 좋았다. 럭키 그룹에서만 한 해 800명 가까이 뽑았다.“


-회사 생활을 어땠나.

”대부분의 회사가 무척 잘 나갔다. 구성원 모두가 활기찼다. ‘동료를 밟고 올라간다’는 생각은 없었다. 모두가 한 가족처럼 지냈으며 일단 들어오면 다들 정년인 56세까지는 일한다고 생각했다.“


-근무시간이 길진 않았나.

”근무 시간 자체는 요즘과 큰 차이 없다. 다만 일주일에 4번 가까이 회식을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회식이 괴로운 이유는 빡빡한 회사 분위기와 과중한 업무에 음주까지 겹치기 때문이다. 당시는 열심히 일만 하면 차도 사고 집도 살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수많은 회식이 괴롭기보다 즐거웠던 이유다.“


-월급만으로 내 집 마련이 가능했나.

”보통 7년이면 집을 살 수 있었다. 대리 월급이 63만원이었는데 87년 당시 목동 아파트가 3000만~4000만원 수준이었다. 은행 이자가 15% 정도여서 저축만 잘 해도 부모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충분히 집을 살 수 있었다.“


-맞벌이 부부는 드물었겠다.

”요새는 맞벌이가 필수가 됐지만 당시는 선택이었다. 직원 10명중 1명 정도가 맞벌이 부부였는데, 먹고 살기 위해서라기보단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대다수가 외벌이로 자녀 둘을 낳고 길렀다.“


-평균 근속년수는 얼마였나.

”당시만 해도 25년을 일하는 게 당연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기점으로 회사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동기들은 보통 20년 넘게 근무했다. 나도 23년 간 있었고.“


-독재 시절의 불편함이나 두려움은 없었나.

”무척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남산 간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민주화 운동가 등 소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평범한 직장인들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무심하게 살아왔다고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열심히 일해서 집 사고 가정을 꾸린다는 생각으로 살아갔다.”


-87년과 2017년, 두 시절을 비교 한다면.

“87년에는 인프라는 형편없었지만 희망이 있었다. 오늘날 자식 세대들이 ‘헬조선’이라 부르는 이 나라를 보며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끼는 이유다. 너무 나와 우리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온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이제는 숨 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2017

“미래에도 내집 마련은 상상이 안된다” “미래에도 내집 마련은
상상이 안된다”
17년 대기업 직장인 나경민

나경민(28)씨는 소위 명문대를 나온 대기업 3년차 직장인이다. ‘취준생’들이 부러워할 만 하지만 그는 “결혼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말한다. “학자금ㆍ전세금 대출 갚고 생활비 쓰다 보면 빠듯하다. 그럴싸한 집을 구하려면 5억원은 든다”는 이유에서다. 주변을 보면 ‘배부른 고민’이란 생각도 든다. 취업에 몇 년씩 걸린 친구가 많다. 문과를 나온 친구 중엔 아직 취직을 못 한 경우도 적지 않고, 일자리를 잡았어도 ‘이직’ 고민이 뒤따른다. 나씨는 자신과 친구들의 삶을 “항상 불안해하고 경쟁하는 게 일상”이라고 규정했다.


2017년 근로자

-취직하기 어려웠나.

“쉽진 않았는데 운이 좋았다. 졸업학기에 16개 기업에 원서를 넣었는데 그 중 3곳에 합격했고 S기업을 택했다. 서강대에서 전자공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했다. 졸업학기 앞두고는 취업 연계 인턴 경험도 쌓았고, 학교가 주관하는 취업캠프나 박람회도 다녔다.”


-취업난은 ‘먼 얘기’ 였겠다.

“꼭 그렇진 않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서 느꼈다. 공대 나왔다고 취직이 마냥 쉽진 않다. 여자인 친구 중에는 취업 4수를 한 경우가 있다. S전자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영웅이 된 친구도 있다. 스펙 경쟁도 치열하다. 대기업 봉사활동에 도전할 때 자기소개서를 쓰는데, 스펙란이 있다. 스펙이 있어야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셈이다. 문과생들은 더 힘든 것으로 안다. 사실 문과도 중소기업은 곧잘 취업이 된다. 하지만 다들 미래를 생각해서 대기업을 원한다.”


-회사생활은 어떤가.

“바쁠 때는 일주일에 2~3번씩 야근한다. 회식은 한 달에 두 번 정도고 10시면 끝난다. 회사에서 집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니까 차 끊기기 전에 회식이 끝나는 편이다. 이직 고민은 각양각색이겠지만, ‘정년을 마칠 때까지 한 회사에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적다.”


-생활비는 어떻게 쓰나.

“월급의 3분의 1 정도 저축하고 나머지는 식비ㆍ교통비ㆍ경조사비 등으로 나간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6평짜리 원룸에 자취하고 있어 빚도 갚고 있다. 1년차 때는 학자금 대출도 있었는데 갚았다.”


-연봉에 불만은 없나.

“목돈을 마련하기는 벅차다. 돈 버는 게 결국 차도 사고 집도 사려는 목적 아닌가. 크게 쓴 것도 없는데 돈이 잘 안 모인다. 특히 집값이 너무 비싸다. 서울에선 20년 된 아파트도 5억원은 하더라. 결혼을 먼 미래라고 여기는 것도 목돈이 없어서다.”


-양극화에 대한 생각은.

“스스로 ‘표준적인 삶’이라 여긴다. 고등학교 졸업해서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고 대기업 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집을 사거나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에 벅차다. 사회구조적으로 불합리한 거다. 몇 년을 일해야 5억원을 모을 수 있는지 감조차 안 온다. 갑자기 큰돈을 벌지 않는 이상 여유로워질 수 없는 현실이 정상인가.”


-아버지 세대와 달라진 점은 뭘까.

“취미나 여행 등 개인으로서 누리는 점도 많다. 아버지는 결혼도 빨리 했고 더 젊을 때부터 가장으로서의 짐을 짊어졌으니까. 삶은 안정성은 나빠졌다. 이미 고용 불안을 느낀다. ‘대기업은 오래 다니면 10년’이라고들 하지 않나. 항상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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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공무원 열풍, 패기 없는 젊은이가 문제인가

198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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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외벌이 가장에 밀린 ‘미스 김’에게 승진은 사치였다” “외벌이 가장에 밀린
‘미스 김’에게 승진은 사치였다”
87년 여성 공무원 김혜정

남자 48명 vs. 여자 2명.

31년차 서울시 공무원인 김혜정(53ㆍ여) 보육담당과장이 1986년 서울시 7급 공채에 합격할 당시의 성비다. 김 과장은 “그땐 정말 남성 중심적이었다”고 말했다. 불합리한 차별이었지만 ‘남성 가장에 대한 배려’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1987년 공무원

그러나 임신한 ‘미스 김’ 앞에서 담배를 참는 배려는 없었다. 회식 2차는 유흥주점에서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마저도 열심히 쫓아다녀야 인사고과를 챙길 수 있었다. 그는 “1987년은 개인보다 조직이 우선인 시대였다. 공무원이라는 소명의식으로 희생을 감수했다”고 말했다.


-왜 공무원이 됐나.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살림하는 여자’가 성공한 여성으로 간주되던 때다. 하지만 나는 직장생활을 하고 싶었다. 금융권 두 곳에도 합격했지만 오래 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공무원을 택했다. 은행에 들어가 많이 벌던 친구들은 3~4년 후 결혼하며 관뒀다. 난 31년째 일하고 있으니 잘한 선택이다.”


-공무원 되긴 어려웠나.

“7급 공채 경쟁률이 56대 1로 높았다. 노량진이 아니라 종로에 있는 학원에 다녔다. 빽빽하게 앉아서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운이 좋아 반년 만에 합격했다.”


-여성이 드물었겠다.

“7급 공채로 50명을 뽑았는데 2명이 여자였다. 군대 가산점이 있었다. 취업하는 여자가 소수라 수험생도 적었다. 첫 발령 받은 구청 세무과 직원 30명 중 여자가 7~8명이었는데, 7급 공채 출신은 혼자였다. 나머지는 9급 출신이거나 일용직이었다.”


-남녀차별이 심했나.

“30년 동안 세 번 승진했다. 굉장히 더딘 편이다. 남자 상사들은 ‘미스 김은 남편도 있고 나이도 어리지 않냐. 우리는 가장이다’는 말을 자주 했다. 분야도 한정적이었다. 1989년 시청에 가정복지국이 처음 생기자 거의 모든 여성 공무원이 배치됐다. 인사ㆍ감사ㆍ예산 등의 부서는 ‘금녀구역’이었다. 90년대 들어서야 여성 한두 명을 상징적으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조직 분위기는.

“권위적이었다. 여자는 바지정장 입기도 어려웠다. 임산부 앞에서도 사무실에서 거리낌없이 담배를 피웠다. 상사보다 이른 퇴근? 말도 안 됐다. 오후 6시 애국가가 나오면 국기 하강식을 했는데 그때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 근무를 이어갔다. 정치 얘기는 피했다. 하더라도 좋은 이야기만 했다.

한편으론 관계 중심적이었다. 먹지에 영수증 쓰던 아날로그 시대다. 얼굴 보고 일하는 게 당연한 만큼 인간관계가 중요했고, 승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엔 명절 때면 각 기관들로부터 선물세트가 답지했다. 기관과의 관계를 ‘유도리(ゆとり)’ 있게 맺지 못 하면 ‘꽉 막혔다’는 평가를 들었다. 전산화 이후 개인 업무 중심으로 바뀌었고, 청렴도도 높아졌다.”


-후배들을 보면 어떤가.

“정말 스펙이 좋다. 외국어는 기본에 각종 자격증도, 인턴 경험도 많다. 그만큼 자부심과 성공욕구도 강하다. 평가에 예민하고 경쟁적이다.

여성들은 ‘수퍼맘 콤플렉스’를 앓는 것 같다. 과거보단 훨씬 나아졌지만 ‘나의 성공과 자식의 성공을 동시에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이 큰 것 같다. 여전히 여성으로서의 삶은 힘든 구조인 셈이다.”

2017

“차별 덜하고 처우는 안정적. 공무원 말고 있나?” “차별 덜하고 처우는 안정적.
공무원 말고 있나?”
17년 여성 공무원 이미경

288대 1.

이미경(25ㆍ여)씨가 지난해 서울시 7급 공채(행정직)에 합격할 때의 경쟁률이다. “스펙 경쟁이 치열한데 기업의 고용 안정성은 너무 떨어져서” 공무원 시험을 쳤다. 1년 2개월 동안 주말 없이 하루 8시간씩 공부했다. 합격자들이 평균 2년을 준비하는 것에 비해 빨리 붙었다.

2017년 공무원

생활은 만족스럽다. 여성이 절반이고, 분위기는 수평적이다. 육아휴직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점도 좋다. 문제는 돈이다. 기업 다니는 친구들의 푸념을 들을 때는 ‘공무원 되기를 잘했다’ 싶다가도, 텅 빈 통장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왜 공무원이 됐나.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하려다 실패했다. 대외활동 경험이나 공모전 수상 경력이 적었다. 스펙이 화려한 친구들을 보며 ‘기업 입사 경쟁은 못 뚫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이윤을 좇기보다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했다.”


-공무원 열풍을 체감했나.

“친한 친구 중에서만 3명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한 뒤 몇 년째 소식 끊긴 친구도 있다. 직업 안정성 때문이다. ‘백세시대’라는데 기업은 고용이 불안정하다. 50살이 됐을 때 5급으로 일하고 있겠지만, 기업에선 임원이 돼 있을까? 한편으론 시험으로 승부 보는 게 공정하다는 생각에 ‘공시생’ 대열에 뛰어들게 된다.”


-준비과정은 어땠나.

“준비할 때는 너무 불안하다.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공부하는데 뚫고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나누는 사람 없이 8시간씩 공부하다 보면 억울하단 생각도 든다. 부모님과 갈등도 있었다. 지난해 10월 대구 지방직 9급은 최종합격하고 서울시 7급은 면접이 남아있었다. 스터디를 하며 7급 면접 준비에 ‘올인’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9급이라도 어디냐’며 연수를 받으면서 혼자 준비를 하라고 했다. 결국, 부모님 말대로 했다.”


-남녀 차별을 느낀 적은 없나.

“입직 동기 성비와 팀 내 성비 모두 오십 대 오십이다. 팀장도 여자다. 다만, 우리 팀은 여자가 약간 많은 편이다. 차별을 느낀 경우는 없다. 육아휴직을 눈치 안 보고 최대치까지 쓸 수 있는 것도 엄청난 장점이다. ‘남초’인 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여자로서 느끼는 소외나 차별이 있다’며 부러워한다.“


-조직 분위기는 어떤가.

”수평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분위기다. 기수문화나 소위 ‘다나까’ 체를 쓰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복장도 자유롭다. 막내라서 회식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든지, 상사 눈치를 보며 퇴근을 못 하는 일도 없다. 상사들은 나를 ‘이 주임’ 또는 ‘이미경씨’라고 부른다. 만약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였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마냥 좋은가. 걱정되는 건 없나.

”돈이다. 공무원 월급이 사실 얼마 안 된다. 관리비ㆍ가스비ㆍ통신비ㆍ교통비ㆍ식비 등을 쓰면 빠듯하게 살아도 남는 게 없다.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은 급여의 50%는 저축하는 것 같더라. 결혼 적령기인 동기들은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이 가능한 얘기냐’고 푸념한다. 그러다가도 ‘먹고 살만큼은 된다’며 스스로 위로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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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엄마의 삶은 더 행복해졌나

198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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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기저귀 빨며 혼자서 애 키우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기저귀 빨며 혼자서 애 키우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87년 전업주부 이상애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이웃 ‘형님’들과 이어가는 한낮의 수다. 남편 흉을 보다가도 해 지면 “애들 아빠 올 시간 됐다, 밥해야지”라는 말을 절로 하던 사람들.

1987년 주부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세 엄마처럼 87년 당시 전업주부 이상애(64)씨도 그랬다. 모유 먹이고 천 기저귀 빨아 아이를 키웠지만 ‘내 일이려니’했다. “남자는 부엌 들어가는 것 아니다”는 시어머니의 말도 당연했다.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다니면 ‘잘 사는 집’이었고, 외식은 1년에 한두 번 특별한 날에만 했다. 고된 일상의 스트레스는 엄마들과의 수다로 풀었다.


-직장에 다니진 않았나.

“첫 애 낳고 한 달 뒤까지 7년 동안 우체국 공무원으로 일했다. 당시 육아 휴직이 출산 전ㆍ후 30일씩이었다. 친정도 시댁도 ‘아이를 봐줄 수 없다. 직장 관둬라’고 했다. 그 때는 어른들이 그만두라면 그렇게 했다. 미련도 없이 ‘이제 집안일이 내 일이구나’했다.”


-전업주부가 된 뒤 가장 힘든 건 뭐였나.

“시댁과의 갈등이었다. 남편이 맏이다. 결혼하고 고향 정선에서 시부모님과 1년 반 함께 살았는데 야단을 엄청나게 맞았다. 출산할 때도 남편 없이 시어머니와 갔다. 지금 젊은 세대라면 못 견디겠지만…. 그 땐 이혼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친정도 보수적이었고,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었다.”


-하루 일과는 어땠나.

“남편과 애들 아침밥 먹여 보낸 뒤 청소하고 빨래한다. 그 뒤엔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엄마들과 수다를 떤다. 카페가 없어 엄마들 집을 번갈아 돌며 커피를 마셨다. 애들이 돌아 오면 밥 주러 가거나, 엄마들이랑 부침개 부쳐서 먹였다. 수다 떨다 남편 올 때 돼서야 장보고 들어가는 날엔 애들도 아파트 앞 공터에서 종일 놀았다.”


-가사노동이나 육아가 고되지는 않았나.

“힘든지 모르고 살았다. 집안일이 내 할 일이었다. 애들 키우기가 마냥 쉽진 않았다. 모유 먹이고 천 기저귀 빨아 키웠다. 대신 분유 값, 기저귀 값 고민은 없었다.”


-남편이 도와줬나.

“전업주부가 있는데 남편이 도와주겠나. 남편은 부엌에 안 들어오는 게 당연해서 가사 분담으로 싸우지도 않았다.”


-자식들 걱정은 뭐가 제일 컸나.

“그때도 공부였다. 87년에 큰 애가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웅변ㆍ주산ㆍ서예 등 남들 하는 것 조금씩 다 했다. 영어학원은 이듬해에 보냈다. 건강 걱정은 안 하고 살았다. 미세먼지니 황사니 하는 얘긴 없었으니. 자식 취업 걱정도 요즘 얘기다. 애들이 공부를 썩 잘하진 않았는데 때 되니 취직하더라.”


-생활비는 넉넉했나.

“남편 월급이 26만~28만 원 정도였다. 생활비 보태려 동네 엄마들이랑 직장인들 와이셔츠 빨아주고, 부자 동네 가서 이삿짐 싸주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보람도 있었다. 88년엔 당시 2400만원 하던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아파트 한 채를 대출 조금 받아 샀다.”


-요즘 젊은 엄마인 딸을 보면 어떤 점이 다른가.

“여행을 많이 간다. ‘쪼들린다’면서도 1년에 한 번씩은 해외로 나가더라. 옛날엔 돈이 없어 나들이도 제대로 한 번 못 갔다. 이런 얘기 하면 딸은 ‘엄마 때랑 달라’ 한다.”

2017

“미세먼지가 무서워 애들 마스크 꼭 씌워서 내보낸다” “미세먼지가 무서워 애들 마스크
꼭 씌워서 내보낸다”
17년 전업주부 이영란

전업주부 이영란(45)씨의 일과는 아이들 중심이다. 초등학교 1ㆍ4ㆍ6학년인 세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전엔 집안일을 한다. 오후엔 아이들 간식 먹여 학원에 데려다 주고 저녁엔 저녁밥 준비, 밤엔 애들 숙제를 봐준다. 엄마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모임에 조금만 소홀하면 정보에 뒤처진다. 미세먼지니, 신종플루니 하는 말들도 신경 써야 한다.

2017년 공무원

프로그래머로 일할 때만 해도 자기 인생이 우선이었다. 둘째가 생겨 직장을 관두고, 셋째를 가졌을 때는 눈물도 났다. 늦게 퇴근하는 남편은 가부장적이진 않지만 집안일엔 소극적이다.


-직장에 다니다 전업주부가 됐나.

“서울에서 12년 동안 웹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첫째 낳고 육아휴직이 90일이었다. 휴직 끝나고 청주의 친정에 아이를 맡겼다. 주말에만 아이 얼굴 봤는데 서울 돌아올 때마다 울었다. 둘째 갖고 ‘더 이상 이럴 순 없다’ 싶어 관뒀다.”


-전업주부가 된 뒤 뭐가 가장 힘들었나.

“서른아홉에 예기치 않게 막내가 생겼다. 첫째 둘째가 어느 정도 컸을 때다. 자격증도 따고 컴퓨터 공부도 다시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끝이다’ 싶더라. 남편은 “생활비 걱정 없게 해 주겠다”고만 했다. 원망스러워 한 달은 말도 안 붙였다.

남편은 가끔 ‘집에서 프리랜서 해라’고 한다. 하지만 애 키우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또 컴퓨터 쪽은 변화 속도가 빨라서 반년만 쉬어도 따라잡기 힘들다.“


-하루 일과는 어떤가.

”지금은 셋 다 학교에 다녀서 좀 낫다. 오전에 집안일을 마치면 운동을 하고 문화센터에서 우쿨렐레를 배운다. 막내가 하교하면 함께 시장이나 도서관에 갔다가 큰 애들 학원갈 때 되면 차를 태워 준다. 가사노동은 하루에 세 시간쯤 한다. 엄마들과 교육 정보 공유하는 시간도 꽤 된다. 전업주부가 아니면 엄마들 커뮤니티에 들어오기 힘들다.”


-가사노동이나 육아가 고되지는 않나.

“애들이 어린이집 갈 나이 되기 전까진 힘들다는 생각만 했다. 내 생활 없이 종일 애만 봤으니까. 혼자 집에만 있다 보니 우울해져 인터넷에서 만난 엄마들과 ‘품앗이 교육’을 했다. 엄마들 몇 명이 집에 애들 모아놓고 영어도 가르치고 책도 읽어줬다.”


-남편이 도와주나.

“밤 10시가 돼야 퇴근한다. 거의 손 까딱 안 했다. 남편에게 ‘애 셋 나 혼자 키웠다’고 말한다.“


-자식들 볼 때 가장 큰 걱정은 뭔가.

”공부다. 대단한 엄마들과 애들이 너무 많다. 생활비의 40% 정도는 교육비로 나간다. 건강 걱정도 컸다.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최근엔 미세먼지 때문에 꼭 마스크 씌워 내보냈다.“


-전업주부를 안 좋게 보는 시선도 일부 있다.

”남자들도 육아휴직 해보면 느끼던데, 전업주부의 삶도 쉽지 않다.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가끔 주위 엄마들과 차 한 잔 하는 모습을 보며 ‘팔자 좋다’할 수 있지만, 그 때가 유일한 자기만의 시간이다.“


-옛날 엄마의 삶과는 어떤 점이 다른가.

”과거보단 여유롭다. 내 엄마는 매일 애들 도시락 세 개씩 어떻게 쌌을까 싶다. 대신 지금은 아이들 교육 경쟁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애들 공부시키려면 엄마도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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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자

일상은 더 풍요로워졌나

1987~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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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연탄불을 조금씩 잠가가며 썼고 반찬도 아껴먹었다” “연탄불을 조금씩 잠가가며 썼고
반찬도 아껴먹었다”
87년 자영업자 이영우

이영우(71)씨는 1987년에 경남 창원의 가음정 시장에서 속옷가게를 차렸다. 오전 7시 30분에 가게 문을 열고 오후 10시 30분에 문을 닫는 생활을 30년간 해왔다. 명절날에도 차례를 지낸 후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1987년 자영업자

노동의 대가는 정직하다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그는 “내가 조금 덜 쉬면 우리 자식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파트 평수를 조금씩 늘려갔고, 두 자녀를 번듯하게 길러냈다. 군사정권부터 민주정권까지를 두루 경험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말한다.


-30년간 매일 15시간을 일했다. 고되지 않았나.

“그 시절에는 모두가 그렇게 일했다. 모두 가난했고 집값은 무척 비쌌다. 대출이자가 15% 가까이 돼 돈을 빌려 집을 살 엄두도 못 냈다. 조금 덜 쉬고 조금 더 아끼면서 한 푼 두 푼 모아야 했다.“


-80년대에도 내 집 마련이 그렇게 힘들었나.

”물론이다. 80년대 초반 남편이 용접기술자로 일했다. 푹푹 찌는 제철소 안에서 하루 12시간 일하고 월급으로 40여 만원을 받았다. 7년을 일하고 나니 창원 변두리에 땅 한 필지(약 70평) 마련할 돈이 생겼다. 아파트를 사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해 10평짜리 아파트를 임대해 살았다. 남편이 퇴직할 무렵 속옷장사를 시작한 것도 결국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가게 임대료는 어땠나.

”10평에 1000만원 정도의 전세였다. 당시만 해도 시장에 하루 수백 명의 사람이 몰렸다. 전세도 매달 올랐고 어느 순간 월세도 받더라. 8년 전 이 가게를 사기 전에는 전세금 9000만원에 월세 100만원까지 냈다. 그래도 여기서 번 돈으로 아파트 사고 자식들 키웠다.”


-불안한 시대적 분위기가 장사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나.

“1987년에 민주주의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나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는 없었다. 창원이 외진 곳이라 영향을 덜 받은 측면도 있겠지만, 군사 정권이라서 돈벌이가 힘들다거나 민주 정부라서 살림살이가 나아지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과거에는 나라 전체가 ‘으쌰으쌰’ 하면서 잘 살아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라 탓, 정치 탓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고.”


-왜 그렇게 느끼나.

“일은 덜하면서 누리고 싶은 건 많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안타깝다. 연탄불을 조금씩 잠가 가며 사용하고 반찬을 아껴먹으면서 그렇게 살았다. 지금 참고 견뎌야 미래에 우리 가족들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보다 지금이 더 힘들어진 측면도 있을 거다. 집값이 훨씬 비싸지고 돈벌이도 열악해졌으니. 그렇다면, 조금 더 열심히 일하고 조금 더 아껴야 한다. 노동의 대가는 정직하다.”


-30년 전과 요즘을 비교하면 언제가 더 행복하다고 느끼나.

“옛날에는 못사는 사람 무척 많았다. 창원에도 소위 ‘달동네’가 있었는데 거기에 가면 단칸방에 네 가족이 모여 살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들 웃는 얼굴이었다.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잘 살아보자’는 마음가짐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2017

"기업 인턴때 '회사에선 내 일을 할 수 없다' 느꼈다" "기업 인턴때 '회사에선
내 일을 할 수 없다' 느꼈다"
17년 자영업자 박은솔

박은솔(25)씨는 20대 창업자다. 지난해 2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김밥가게를 열었다. 월세 110만원의 조그만 공간(26㎡)에서 요리부터 청소, 계산까지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한다. 하루에 12시간 일하고 일주일에 하루 쉰다.

2017년 자영업자

대학에서 조리를 전공한 그녀의 꿈은 특급호텔 셰프였다. 우아한 코스요리를 고급 접시에 담아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달에 20만원을 받는 실습생 신분으로 지켜본 호텔 셰프들의 삶은 상상 속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였다. 김밥집은 ‘꿈과 현실’의 절충점이었다.


-김밥집 연지 1년이 지났다. 막상 해보니 어떤가.

”돈 버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하루하루 느낀다. 육체적으로 무척 고되다. 오전 11시에 가게 문을 열고 오후 10시에 문을 닫는다. 혼자서 하루 100인분을 조리하고 계산, 청소 등도 모두 책임져야 한다. 매달 100만원 넘게 빠져나가는 월세, 가스비는 고정비라 쳐도 조류인플루엔자가 터지면 계란 값이 걱정이고 가뭄이 길어지면 채소 값이 걱정이다. 그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던 것들도 하나하나 챙겨야 한다.”


-셰프라는 꿈을 접은 게 아쉽지는 않나.

“가끔은 김밥집을 꾸려가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막연하게 꿈만 좇기에는 하루하루가 빠듯하다. 정성 들여 요리를 하고 또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고 싶었다. 꿈꾸던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의 내 모습이 행복하다. 요리를 계속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손님들을 보는 것도 보람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 것인가.

“가게는 늘 손님들로 북적이지만 돈 모으는 건 별개의 문제다. 많게는 한 달에 300만원이 넘는 수입을 올리기도 하지만 집세와 생활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무엇보다 수입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적금을 들기도 쉽지 않다. 늘 생계형 고민을 안고 사는 셈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부럽진 않나

“부러울 때도 있다. 안정감이란 측면에서 그렇다. 회사원들은 큰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매달 정해진 월급을 받을 수 있지 않나. 자영업을 하면 장사가 잘되는 달도 있지만 안 되는 달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장사가 안 된다고 월세를 적게 내거나 재료값을 덜 낼 수는 없다. 몸이 아프더라도 감내하고 일을 해야 한다. 가게 문을 닫으면 손님이 줄고 그로 인해 줄어든 수입은 결국 내가 부담해야 할 몫이다. 직장생활을 했더라면 느끼지 않아도 될 것들이다.”


-언제든 그만두고 취업을 할 수 있지 않나

“몸이 고되고 삶이 불안하긴 하지만 장사를 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대기업에서 인턴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회사에서는 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조직에서 일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능력치를 충분히 발휘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가장 답답하게 느껴진 부분이다.”


-미래에 꿈꾸는 모습은 무엇인가.

“가게를 조금씩 넓혀가고 싶다. 내가 운영하는 가게 이름이 ‘아가씨 김밥’이다. 스스로 힘으로 삶은 개척해나가는 젊은 여성들에게 노하우를 가르쳐주고, 그렇게 가게를 하나 둘 늘려가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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